파파치의 나방
아룬다티 로이가 쓴 소설<작은 것들의 신>은 영국 부커상을 수상하고, 전세계적으로 주목을 끌었다. 인도의 한 도시에서 상위계층 가정의 에스타와 라헬이라는 쌍둥이 남매와 그들의 엄마, 암무가 가부장제와 카스트제 같은 숨막히는 사회의 위선에 스러져가는 이야기다.
이 집안의 어른들에게는 쌍둥이의 할아버지인 파파치의 나방이 툭 튀어나온다. 파파치의 나방은 그가 곤충학자로서 공적을 부당하게 인정받을 기회를 놓쳤을 때 갖게 된 분노를 뜻하는데, 그 분노는 시시때때로 가족들에게 폭력과 무관심, 차가움으로 표출된다. 그로부터 받은 학대를 받은 아내 맘마치와 딸 암무에게도 그의 나방은 전해져서 맘마치는 암무에게, 암무는 쌍둥이남매들에게 나방의 존재를 보여준다.
가부장제 사회의 대부분의 가정마다 한 마리의 나방이 전해지지 않을까. 가부장인 남자의 화는 약한 자인 여자들에게 표출되게 되고, 자신들에게 생긴 나방을 여자들도 없애지 못하고 또다른 약한 자인 자녀에게로 전달하는 구조가 되고 만다.
억압받는 자
나는 이 책에서 절대적 피해자인 라헬과 에스타, 암무, 벨루타에게 마음이 간다. 벨루타는 천한 계급 출신이어서 뛰어난 능력에도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암무와는 진정으로 사랑으로 나눌 수 있었다. 어쩌면 맘마치와 벨루타의 아버지인 벨리아 파펜 같은 이들도 폭력과 무지의 희생자이긴 하지만, 벨루타 만큼 마음 아프진 않다. 맘마치와 벨리아 파펜은 자신들의 믿는 사회적 관습을 지키며 위선적으로 행동하기라도 했지만, 4명은 행동하지도 못하고 각자 자신들을 겨우 돌보며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의 삶에 대한 안타까움은 차코와 베이비 코참마를 보며 분노케 한다. 차코와 베이비 코참마는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에 반성 한 번 없이 잘못이 드러날까 불편한 기색만을 비친다. 철저하게 자신들의 뜻대로 살아가던 사람들이다. <정의란 무엇인가>에 따르면 그들은 부담을 지지 않는 자아의 소유자들이다. 어쩜 그렇게 뻔뻔할 수 있는가?
암무가 원하는 세상에서 살기 위해서 암무는 무엇을 어떻게 했으면 좋았을까. 그녀의 남편이 능력있고 따뜻한 남자였다면 좋았을텐데 같은 생각은 쓸모없다. 그녀가 아예메넴의 집에서 학교를 세울 능력과 자금을 조금씩 준비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그러기엔 시간이 부족했을려나.
무엇이 필요할까
내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세상은 세상 어딜가더라도 불가능할 것 같다. 암무가 살았던 시절의 그곳이나,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곳 - 성평등주의가 힘을 얻고 있고 민주주의가 진리처럼 여겨지는- 이나, 사회적 약자에게는 여전히 유리천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희망과 꿈을 구체화시켜서 조금씩 준비해가면서 과정을 즐기면서 사는 게 최선일까? 혹은 공감하고 지지해주는 단 한 사람만 있었어도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암무에게 무엇이 필요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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