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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비주얼페이지

<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 _ 최은영 저

by 비주얼페이지 2022.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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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의 소설<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에서 이건 딱 나인데, 싶은 주인공이 나왔다. 
늦깍이 대학생 희원은 영문과 수업을 듣고 있다. 용산참사 사건을 소재로 "생각이나 판단을 최대한 줄이고, 통근 길에 (내) 눈에 보이던 것들, 소리, 냄새에 대해 묘사하는 방식으로" 과제물을 썼다. 수업 중 토론에서 그녀의 에세이는 개발에 부정적인 입장을 글 속에 숨기고 있다는 의견을 듣게 되고, 그 의견에 반박하는 한 학생이 나선다. 그 학생은 지나치게 투입된 공권력의 "잔인함"이 옳은지 되묻는다. 
그가 "잔인함을 잔인함이라고 말하고, 저항을 저항이라고 소리 내어 말할 때" 주인공의 마음은 떨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화원은 "누군가가 내가 느꼈던 감정과 생각을 날것 그대로 말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한편으로는 덜 외로워졌지만,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그럴 수 없었던, 그러지 않았던 내 비겁함을 동시에 응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나의 생각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게 두렵다. 두리뭉실하게 글을 쓴다. 반대하는 것도 찬성하는 것도 아닌데, 관심은 있어 보이는 척 하고 싶은 마음으로 글을 쓴다. 몇해 전에 글쓰기모임에 참여했었다. 엘리노어릭비 영화를 보고 가족을 잃는다는 것에 대해 글을 쓰면서 세월호 참사를 언급했다. 쓴 글을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갑작스레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은 정말 안타깝고 슬픈 일이라고 썼던 거 같다. 참사에 대해 책임을 환기하거나 집회에 동참하자는 내용은 없었다. 슬픔에 대한 나의 마음을 다룬 글이었다.
그 글에 한 줄의 댓글이 달렸었다. 댓글을 단 이가 쓴 글들은 자신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사회적 이슈에 관한 내용들이 많았다. 댓글 역시 정확히 생각안나지만, 슬픔을 느껴서만 안된다는 내용이었던 같다. 감상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고, 행동으로 옮겨라는 뉘앙스를 느꼈다.
뜨끔했다. 참사를 언급하는 게 어쩐지 나답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 쓴 글이었다. 그래서인지 그 글을 쓰고 다듬는 게 너무 어려웠다. 계속 내 마음을 포장을 하려니 힘들었다. 포기하고 싶었지만 나도 슬퍼하고 있다고 표현하고 싶었다. 겨우 쓴 글을 내보이고 내 글에 붙은 댓글을 보고서 이게 틀린건가 싶은 불안한 마음을 떨쳐내기가 어려웠다. 그 후로는 사회적 이슈에 대해 쓰지 않는다.
누군가가 "편향되지 않고 균형감 있게 잘 쓴" 글이라고 말했을 때, 희원의 속마음은 이랬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수치스러웠다. 내가 그 글을 쓰면서 남들에게 어떻게 읽힐지 의식했다는 사실을 나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 표현하고 싶은 생각이나 느낌을 그대로 담았을 때 감상적이라고, 편향된 관점을 지녔다고 비판받을까봐 두려워서 나는 안전한 글쓰기를 택했다. 더 용감해질수 없었다." 
나도 그렇다. 용기가 안난다. 희원의 글에 내려진 동료 학생들의 평가와 그 행간을 읽어내는 희원의 속마음은 정말  따끔하고 매서웠다. 
그런 한편으로 궁금했다. 대학 강사가 된 희원은 예전과 달리 학생들에게 자신의 입장과 의견을 밝히는 데 어려움이 없을까? 나는 그녀가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동안 논문을 쓰기 위해 판단을 하고 주장을 펼치는 연습을 많이 했기에 능숙할 것이다. 직업적으로 "남들에게 어떻게 읽힐지 의식"하면서 글을 계속 쓰는 생활을 하면서 단련되지 않았을까? 
나도 그럼 더 글을 많이 쓰면 될까? 좀더 용감해질 수 있을까? 그럴꺼 같다. 단, 자기의 이름과 얼굴을 드러내는 조건이 붙어야 되는 거 같다. 내게 희원의 수업을 담당했던 그 강사는 자신의 정체가 드러남을 느낀 후 의식했든 아니든 사라져 버린 것처럼 느껴진다. 반면 희원은 활발하게 학술활동을 하며 학생들을 가르친다. 계속 글을 쓴다. 정체가 드러나 있다. 두 사람의 다른 현재를 보며 정체를 노출할 수 있는 용기가 글쓰기 생활을 지속하게 만드는 동력이라는 생각을 한다. 
나는 음.......나의 정체가 드러나는게 두렵다. 그래서 말하기보다 나를 감출 수 있는 글을 쓰는게 좋은데, 글을 쓰다가 나의 정체가 드러날 수 있다는 위험을 느끼면 글쓰기를 중단한다. 시간이 지나면 글쓰기 갈증을 풀려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나의 밑천과 정체가 드러나기 직전이 되면 그만둔다. 나는 언제까지 이런 쳇바퀴만을 돌릴 것인가? 사라지는 게 더 두렵지 않은가?
며칠 전 본 영화<두 교황>에서 두 교황의 대화가 떠올랐다. 교황이 교황의 자리에서 내려오기로 결심한 후, 추기경에게 결심을 전하며 고해성사를 했다. 교황은 "아이였을 때 가장 먼저 지은 죄는 삶을 제대로 즐길 만한 용기를 갖지 못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책 속에 파뭍혀서 공부만 했죠."라고 말했다.
그리고 또다른 대화 내용을 떠올린다. 
"추기경님은 참 인기가 많아요. 이렇게 인기 있는 이유가 따로 있소?"  
"그냥 제 자신으로 살려고 할 뿐이에요." 
"난 나답게 살려고 할 때마다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더군요. 그리고 교황으로 살아야 하니 선택의 여지가 없고요." 
용기없는 삶이 부끄러운 한 사람으로서 영화 속 교황의 고해는 너무 고통스러운 말이었다. 나도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었지만, 교황처럼 제대로 즐길 줄 몰라서 도망친 장소였기에 의미없는 시간들이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도대체 얼마나 큰 죄를 지으며 나 자신을 부정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교황이 나답게 살려고 한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교황의 자리는 얼마나 무겁기에 선택의 여지까지 없애버리는 걸까. 
나는 어떻게 나답게 살아야 하나. 나의 이름과 얼굴의 무게는 얼마만큼일까. 어떻게 나를 만날 수 있을까. 어떻게 나를 노출할 수 있을까. 실마리를 조금이라도 풀어보고자 '어떻게'가 들어간 질문들에 '왜' 혹은 '언제', '어디서' 와 같은 말로 대체한다고 해도 수많은 질문들만 쌓일 뿐, 당장 답을 얻을 수 없다. 
어디서 시작해야 할까.
영화 속에서 추기경이 벼랑 끝에서 고뇌를 하던 순간들을 떠올려본다. 벼랑에 올라 숙고의 시간을 거쳐 결단을 내린 그 순간들이 그를 자신답게 살 수 있도록 이끌었다. 프로포즈했던 연인과 결혼 직전 헤어지고 사제가 되기로 했을 때, 독재기간 동안 추기경의 행적에 대한 세간의 오해 때문에 먼 곳으로 쫓겨났을 때, 세상 끝과도 마찬가지인 벼랑 끝에서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을까. 지금 내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 무엇인가.
추기경은 변화를 겪고 난 후 자신의 행적에 대해 "승리를 거둘 때마다 속죄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나의 작은 승리,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일단 기부할 곳을 찾아야겠다. 기부콩도 귀찮아서 놔두고 그냥 없어지곤 했는데 챙겨서 기부해야겠다. 코로나19사태가 잠잠해지면 봉사활동에 나서야겠다.  
내 마음과 신념에 더 귀기울여 어떤 도움을 주고 싶은지 알아야겠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곳을 찾아서 나눔을 하고, 그 곳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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