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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예술이라는 개념의 역사_고대에서 르네상스까지

by 비주얼페이지 2022.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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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시작

예술 art이라는 말은 ars라는 라틴어에서 나왔는데, 이것은 그리스어인 테크네를 번역한 것이다. 처음부터 예술이 라틴어와 그리스어와 같은 의미를 가졌던 것은 아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의미는 변했다. 각각의 변형은 가벼웠지만 지금의 의미와 과거의 의미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

테크네와 아르스는 "솜씨, 즉 물품, 가옥, 동상, 배, 침대, 단지, 옷 등을 만드는 데 필요한 솜씨뿐만 아니라 군대를 통솔하고 토지를 측량하며 청중을 사로잡는 데 필요한 솜씨까지 뜻했다. 이 과정과 행위를 포함하는 직업에는 "건축가, 조각가, 도공, 양복장이, 전략가, 기하학자, 변론가 등"이 있다. 이들이 모두 같은 아트의 규칙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규칙 없이 단순히 영감이나 환상으로부터 무언가를 하는 일은 고대인이나 스콜라 철학자들에게는 예술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시를 예술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갈레누스는 "예술을, 일정한 목적에 이바지하는 일련의 보편적이고 적합하며 쓰임새 있는 법칙들"이라고 주장했다.

중세시대의 예술

고대와 중세 시대의 예술은 그 범위가 현재보다 훨씬 넓었고, 수공예까지 포함했다. "솜씨 있는 제작만 예술이라 칭해진 것도 아니며 제작하는 솜씨 그 자체, 규칙의 습득, 전문지식 등도 예술로 지칭되었다." 문법과 논리학도 규칙이 있는 전문기술로서 예술이라고 일컬어졌다. 당시의 예술 구분 기준은 "예술을 실천하는 데 정신적 노력만이 필요한지 혹은 신체적 수고도 함께 필요한지에 따라" 정해졌다. 고대 사람들은 정신적 노력만을 필요로 하는 것을 '교양적'이라고 말했고, 신체적 수고도 따르는 것을 '범속한' 것이라고 불렀다. 중세에는 범속한 것을 '기계적인 예술'이라고 불렀다.

중세시대의 아르스는 더 완벽한 종류의 예술, 교양 예술로서만 규정되었다. "교양 예술은 문법, 수사학, 논리학, 산술, 기하학, 천문학, 음악 등"의 학문이었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과목이었는데, 이론만을 가르쳤다. 중세의 대학에는 7개의 교양학과를 갖추고 있었는데, 교양학과 균형을 이루도록 7개의 기능술을 정했다. 12세기에 유명했던 라둘프의 목록이나 후고의 목록을 살펴보면, 우선 라둘프의 것에는 '식량제조술, 직조술, 건축술, 운송술, 의술, 교역술, 전투술이 있다. 후고의 것에는 직조술, 장비술, 항해술, 농작술, 수렵술, 의술, 공연술이 있었다.

여기에는 오늘날 예술이라고 불리는 음악이 유일하다. 그 이유는 "작곡, 가창, 연주 등 실기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화성이론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시는 당시에 철학 혹은 예언으로 믿었기 때문에 시인은 예술가가 아니라 예언가로 불렸다. 화가나 조각가도 교양예술인에 들 수 없었다. 왜냐하면 실용성 면에서 시각예술은 중요한 축에 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

르네상스 이후로 이 개념의 의미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크게 말하자면 "첫째, 공예와 학문들이 예술의 영역에서 빠지고 시가 들어오게 된 것이다. 둘째, 공예와 학문이 삭제된 후 예술로 남은 것들이 하나의 응집력 있는 단일체, 즉 기술과 기능과 인간적 산물이라는 별도의 부류를 이루게 된 것이다."

이미 고대의 그리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규칙을 통해 시를 하나의 기술, 나아가 예술로 다뤘다. 덕분에 시의 예술로의 진입이 쉬워졌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때마침 이탈리아에서 번역, 출간되면 많은 지지를 받게 되면서 예술로서 위상은 확고해졌다.

공예를 순수예술에서 떼어내려는 예술가들의 열망은 르네상스 시대에 매우 강했다. 그 바탕에는 사회적 지위를 높이려는 욕구가 있었다. 16세기 이탈리아에서 "미를 산출하는 화가, 조각가, 건축가들은 더 높은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이는 당시의 경제상황을 반영하기도 했는데, 중세의 산업과 상업이 쇠퇴하면서 예술품을 좋은 투자대상으로 여기는 세태가 조성되었다. 이런 상황은 "예술가들의 재정 상태 및 사회적 입지를 개선시켜주고 그들이 야심을 드높여주었다." 결과적으로 장인들과 예술가들의 구분을 촉진하게 되고 예술가들은 교양예술의 대표주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 속에서 화가가 조각가가 먼저 인정을 받았다.

순수예술과 학문을 구별이 이제 문제가 되었다. 화가와 조각가들은 장인으로서 역할에 만족하지 않고 학자로서 인정받길 원했다. 학자의 사회적 지위가 월등히 높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화가와 조작각들은 "자신들의 작업을 지배하는 법칙을 충분히 이해하고 자신들을 작품들을 정확하게 수학적으로 산정해내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경향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레오나르도 다 빈치, 파치올리 등의 작품과 작품 노트에서 나타난다.

르네상스가 무르익고 나서야 이 경향에 대한 반론이 조성되었는데, 미켈란젤로나 갈릴레오 같은 반대론자들은 "예쑬은 학문보다 나은 일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학문과 동일한 일을 할 수는 없다"라고 주장하였다.


인용문의 출처: <미학의 기본개념사>/ W. 타타르키비츠,손효주/미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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