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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비주얼페이지

지금은 우리 모두가 알아야 할 때_<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서평

by 비주얼페이지 2022.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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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크리스마스 즈음 부르키나파소의 젊은 혁명가인 상카라가 스위스의 한 학자에게 그가 쓴<아프리카의 낮은 손>을 읽었다며, 뵙고 싶다고 전화했다. 전화를 받은 이는 장 지글러. 1983 년부터 1987년까지 대통령으로서 부르키나파소의 대개혁을 이끌었던 상카라가 도움을 요청한 장 지글러는 스위스 출신 학자이자 활동가이다.


그는 유엔 식량특별조사관으로서 전 세계 기아 현장을 다닌 경험을 바탕으로 1999년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썼다. 일반인도 쉽게 알 수 있도록 아들, 카림과 대화를 나누는 형식을 빌려와서 기아와 관련된 인물, 국제기구, 역사, 통계 등을 자세하게 다뤘다. 2편의 서문과 에필로그, 후기가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상카라의 나라, 부르키나파소는 아프리카 대부분의 나라와 마찬가지로 프랑스 식민지배에서 벗어났지만 여전히 프랑스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국민들은 정치부패와 오랜 가뭄으로 인해 기아에 시달렸다. 상카라와 그의 동료들이 개혁드라이브에 시동을 걸자 프랑스와 주변국의 눈총세례가 쏟아졌고, 몇 년 후 눈먼 시기심 탓에 상카라는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나라는 성장동력을 잃었다. 결국 남은 것은 아프리카의 여느 국가와 같이 기아와 영양실조 뿐이었다.

아프리카 외에도 지구촌의 많은 국가들이 기아와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다. 장 지글러는 기아의 원인을 5가지 정도로 요약한다. 자연재해와 정치부패, 시장가격 조작, 전쟁 그리고 경제봉쇄정책. 저자는 기아 희생자 중에서 특히 농촌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불행에 안타까워 한다. 주야장천 일해도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

원인을 빈곤국 정부가 가진 막대한 외채, 유럽국가의 덤핑정책, 일부 국가 펀드의 무분별한 경작지 매입 등이라고 밝히고, 해결책으로 투기금지, 농경지 약탈, 농업연료, 농업덤핑 금지 등을 제시한다. 효과적인 해결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서방정부는 실행으로 옮기지 못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정부정책에 비위가 상한 거대 다국적 기업이 경제적, 정치적 보복에 나서게 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 보면 지금 어디선가 굶주리고 있는 아이들 생각에 가슴이 아프고, 이들을 도울 방법을 찾아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빈곤의 원인으로 지목된 정치적, 환경적, 경제적 재앙의 지속성과 반복성을 사회구조적 결함 탓으로 돌리고 말지도 모른다. 그런 독자들에게 저자는 따끔하게 일침을 날린다. 민주국가에서 "자유와 기본권을 누리고"(p.30) 있는 우리 모두가 조직적으로 움직여서 잘못된 질서를 깨뜨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카라와 그의 동료들이 해냈듯이 지구촌 구성원 모두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나라를 바로 세우고, 자립적인 경제를 가꾸려는 노력"(p.168)을 우선시 해야 한다고 부연한다. 카림이 던진 수많은 질문을 화두로 삼아 개인과 조직이 자성하고 새로운 미래를 위해 행동에 나서야 한다.

저자는 지속성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파키스탄에서 "예방접종을 한 후 어린이들이 제대로 먹지 못하고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바람에 다시금 면역력 결핍 상태에 놓"(p.14)여서 다시 소아마비에 노출된 사례를 소개했다. 국제기구 또는 전문가들이 단 한 명의 아이라도 살리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우리의 무지와 관심 부족으로 인해 희생자는 줄지 않고 있다. 게다가 기아 희생자를 돕기 위한 손길을 악용하는 세력이 나타나면 원조를 비난하는 여론의 목소리가 커지게 되고 원조는 중단되기도 한다. 우리 모두가 합심하여 지속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허사가 되고 만다. "하나의 전선에서 이룬 승리는 다른 전선의 패배로 인해 수포로 돌아간다"(p.96).




상카라와 동료들의 행보는 아주 먼 곳의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잘 아는 어떤 나라를 떠올리게 한다. 바로 전쟁의 잔해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우리나라다. 우리가 해낸 것처럼 그들도 다시 일어서서 달릴 수 있다고 한다면 지난친 낙관주의일까? 그때와 지금은 구조가 달라서 할 수 없다고 체념한다면 너무 이른 포기다. 지금 필요한 것은 스스로 질문을 하며 헤쳐나가겠다는 다짐과 용기다. 구조에 몸을 맡기는 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구조가 되는 주체성을 발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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