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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을 견뎌내는 방법 _ 애나 렘키의 <도파민네이션> 책 리뷰

by 비주얼페이지 2022.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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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가 도파민 중독 사건


러시아의 한 마을에서 한 청년이 아버지를 살해한 죄로 법정에 섰다. 그는 무죄를 주장하지만, 배심원단으로부터 유죄 판결을 받았다. 왜 사람들은 그의 주장을 믿을 수 없었을까?

그의 이름은 드미트리다. 카라마조프가의 3형제 중 장남이다. 드미트리는 돈을 흥청망청 쓴다. 수중에 있던 중요한 돈을 즉흥적으로 한 여인에게 줘버리기도 했고, 나중엔 전달해달라고 부탁받은 돈을 하룻밤 술자리에서 대책 없이 써버리기도 했다. 그는 어머니의 유산을 아버지로부터 받아 썼는데, 아버지가 더 이상 줄 유산이 없다고 말하자 아버지가 자신을 속이고 있다고 믿었다.

 


유산 외에도 그루셴카라는 여인을 두고 아버지와 연적이 된 그는 아버지에게 나쁜 감정을 갖게 되고 어느날 갑자기 아버지를 찾아와 심한 폭력을 휘두른다. 또한 아버지로부터 사주를 받았다고 의심되는 이웃의 한 남자를 마구 때리기도 했다.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하고 다녔다.

 

 


이런 드미트리를 보고, 사람들은 돈이 궁해서 혹은 연적이어서 아버지를 살해할 만한 이유가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한편 그의 두 동생들, 이반과 알렉세이는 무죄를 주장한다. 무슨 이유로 그가 누명을 썼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반과 알렉세이는 드미트리가 지키려고 애쓴다는 그의 명예와 양심을 믿기 때문이다. 그는 줄곧 동생들에게 자신의 명예를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나는 비열한 놈이긴 하지만 도둑놈은 아니다.” 그런 양심으로 아버지를 살해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도파민네이션> 읽기


드미트리와 주변 사람들의 관계를 살펴보면 <도파민네이션>이 떠오른다. <도파민네이션>의 저자는 풍요 속에서 풍요로움을 지속하고 싶은 마음이 쾌락의 중독으로 향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드미트리는 돈으로 명예와 사회적 지위를 누릴 수 있다고 믿으면서, 돈을 갖길 원하지만 정당하게 노력해서 벌 생각은 하지 않는다. 게다가 돈이 생기면 사회규범 내에서 제대로 쓰기보다는 술판에서 돈을 쓰며 더욱 쾌락을 원한다. 그러면서도 양심과 명예에 어긋나는 자신의 행동에 괴로워하는데, <도파민네이션>에 괴로움에 대한 설명이 잘 나와있다.

“중독 증상을 겪는 환자들은 공통적으로 자신의 중독 대상이 더 이상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지점에 느꼈던 상실감을 고통스럽게 증언한다. 이 단계에 들어선 환자들은 쾌락의 대상을 탐닉해도 전혀 흥분을 맛보지 못한다. 오히려 비참한 기분에 빠진다. 이때 나타나는 보편적인 증상으로는 불안감, 과민 반응, 불면증, 불쾌감 등이 있다. …
중독 대상에 과거와 같이 다시 의존하게 되는 이유는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랜 금단에 따른 신체적, 심리적 고통을 완화하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 우리가 오랫동안 충분히 기다리면, 우리의 뇌는 중독 대상이 없는 상황에 다시 적응하고 항상성의 기준치를 정상 수준으로 되돌린다.”

유산을 되찾고 그루셴카의 사랑 또는 인정을 얻기 위해서 드미트리는 아버지와 그루셴카를 집착적으로 감시하며 망상에 빠져있다. 고통스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쾌락과 충동에 몸을 맡긴다. 하룻밤의 술잔치 같은 소동 말이다. 그의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은 무엇일까?

 

 

도파민과 쾌락, 고통


드미트리는 어머니의 유산 덕분에 풍요롭게 살아왔으나, 군 제대 후 벌이도 재산도 일정치 않은 상황에 빠졌다. 그런 그에게 아버지는 그가 이미 유산을 다 써버렸다고 말한다. 갑자기 막다른 길에 몰린 드미트리는 쾌락인지 고통인지 모를 중독에 빠져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한다.  

<도파민네이션>에 따르면 “도파민은 인간 뇌의 신경전달물질”로서 “ ‘보상 그 자체의 쾌락을 느끼는 과정’보다 ‘보상을 얻기 위한 동기 부여 과정’에 더 큰 역할을 한다. 저자는 상자 속 쥐 실험에서 ‘초콜릿은 뇌의 기본 도파민 생산량을 55퍼센트 늘리고, 섹스는 100퍼센트, 니코틴은 150퍼센트, 코카인은 225퍼센트’를 늘렸다고 알려준다.

한편 쾌락과 고통은 ‘뇌의 같은 영역에서 처리되며 대립의 메커니즘을 통해 기능한다는 사실’을 신경과학자들은 밝혀냈다.  “어떤 쾌락 자극에 동일하게 혹은 비슷하게 반복해서 노출되면 초기의 쾌락 편향은 갈수록 약해지고 짧아진다. 반면 이후 반응, 즉 고통 쪽으로 나타나는 반응은 갈수록 강하고 길어진다. … 동일한 효과를 얻기 위해 앞서 선택한 쾌락을 더 많이 필요로 하게 된다. 쾌락을 느끼기 위해 중독 대상을 더 필요로 하거나 같은 자극에도 쾌락을 덜 경험하게 되는 것을 내성이라고 한다. 내성은 중독의 발생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다.”



<도파민네이션>의 저자는 ‘현실감 소인’과 ‘이인증’에 대해 설명한다. “실제 생활이 기대한 이미지와 맞지 않을 때, 우리는 자신이 만들어낸 그릇된 이미지만큼이나 거짓된 소외감과 비현실감을 느끼게 된다. 정신의학자들은 이 느낌을 현실감 소실과 이인증이라고 부른다. 이는 자살을 생각하게 할 만큼 무서운 증상이다. 우리가 현실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면 생을 마감하는 것도 대수롭지 않게 느껴진다.”

드미트리는 자신이 원하는 부유함과 유능함과 달리 현실에서 무능하고 돈에 쪼들리고 아버지와 삼각관계에 놓여있다. 그는 아버지나 다른 사람을 때리거나 누군가를 협박하는데 거침없고 자신의 목숨에 개의치 않는다.



쾌락 중독에서 벗어나는 법

 

<도파민네이션>에서 저자는 해결방법과 그 효과를 설명한다.  “거짓 자아의 해결책은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근본적인 솔직함이 필요하다. 근본적인 솔직함은 우리를 자신의 존재에 붙들어 놓고 세상의 현실을 느끼게 한다. 또한 온갖 거짓말을 고집하는 데 필요한 인지 부하를 줄이고, 매 순간을 더 진심으로 살도록 하는 정신적 에너지를 만든다. 우리가 더 이상 골머리를 썩여가며 거짓 자아를 내세우지 않을 때,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더 열린 태도로 대할 수 있다.”

드미트리는 유산에 대한 환상이 있고, 사랑에 대한 열정과 갈망이 있다. 그는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의 부재를 깨달을 때마다 좌절하고 괴로움을 겪는다. 환상을 깨뜨리기 위해서 근본적인 솔직함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사고방식이 있는데, 저자는 ‘여유의 사고방식’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한다.

 

 


여유있는 사고방식을 갖게 되면 “주변 사람들이 나와의 약속을 지키고,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세상과 미래에 대해 긍정적인 기대를 갖게 된다. 세상이 질서 있고 예측 가능하며 안전한 곳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긴다. 무언가 부족하더라도 상황이 괜찮아질 거라는 확신하게 된다.”

반대로 ‘결핍의 사고방식’이 존재하는데, 저자의 설명을 읽어보게 되면 드미트리를 떠올리게 된다. “주변 사람들이 거짓말하고 약속도 안 지킬 때, 우리는 미래에 대해 믿음을 잃게 된다. 세상은 질서 있거나, 예측 가능하거나, 안전한 곳이 될 거라고 기대할 수 없는 위험한 곳이 된다. 우리는 경쟁적인 생존 모드로 들어가 장기간의 이득보다 당장의 이득을 선택하게 된다.”

그는 아버지와 그루셴카를 믿을 수가 없고, 스메르쟈코프와 주변 사람들을 제 식대로 이용하려고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드미트리에게 세상은 위험한 곳이고 당장의 이득을 쫓아야 하는 곳일 뿐이다.



<도파민네이션>의 저자는 수치심에 대해 설명한다. 과용을 하게 되면 수치심 또는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데 두 감정은 구별하기가 힘들다. “이런 감정이 일어나면 처벌에 대한 공포와 함께 후회가 밀려오고,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진다. 무언가 들켰을 때 후회가 찾아오는데, 이때 후회는 행동 자체에 대한 후뢰를 포함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사회적 처벌의 한 형태인 소외에 대한 두려움은 특히 강력하다. 버려지고 따돌림당하며 앞으로 무리에 끼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내면의 솔직함을 마비시키기 충분하다.”

드미트리는 자신의 행동과 양심이 서로 배반되는 상황에서 수치심을 느끼고 있다. 수치심-죄책감의 감정은 스스로가 경험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반응에 달려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도파민네이션>에서 몇 문장을 추려봤다.

“상대가 거부, 비난, 회피의 감정을 드러내면 우리는  파괴적 수치심의 사이클로 들어가게 된다. 파괴적 수치심은 수치심의 감정적 경험을 심화시키고, 처음에 수치심을 느끼게 했던 행동을 완전히 고정시켜 버린다.”

“과용은 수치심으로 이어지고, 수치심은 집단의 외면 혹은 집단에게 거짓말을 해서 외면을 모면하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이는 결국 고립을 낳고 사이클이 끝없이 이어지면서 중독 대상에 대한 의존도 계속되는 결과를 낳는다. 파괴적 수치심의 해결책은 친사회적 수치심이다.”

“친사회적 수치심 사이클은 다음과 같이 돌아간다. 과용은 수치심으로 이어지고, 수치심은 근본적인 솔직함을 요구하는데, 솔직함은 우리가 파괴적인 수치심에서 본 것 같은 외면이 아니라 수용과 공감을 낳는다. 그러면서 벌충에 필요한 행동들이 어우러진다. 그 결과 유대감은 커지고 중독 대상에 대한 의존은 줄어든다.”


 


저자는 “친사회적 수치심은 수치심의 감정적 경험을 누그러뜨리고, 수치스러운 행동을 멈추거나 줄이도록 도와준다. 자존감도 지켜준다.”고 강조한다.

드미트리가 갖고 있는 수치심이 파괴적 수치심이 될지 친사회적 수치심이 될지 여부는 다른 사람에게 달려 있다고 봐도 될까? 소설의 내용으로만 봐서는 드미트리에게 판결을 내린 사람들과 증인으로 나선 사람들은 그를 외면하였다. 반대로 그의 형제들은 그를 믿었고 친사회적 수치심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드미트리에게 필요한 것은

 

결론적으로 그에게 필요한 것은 근본적인 솔직함을 드러내고 여유있는 사고방식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줄 구원과 회복의 손길이다. 그가 이 사건에 휘말리기 전에 친사회적 수치심의 사이클에서 사람들과 교류할 기회가 있었다면 달라질 수 있었을까? 조시마 장로가 어쩌면 그에게 가능성을 준 사람이었을지도 모르는데, 더 많은 교류가 있기 전에 선종하셨음에 안타깝다. 한편 그루셴카와의 사랑이 이뤄진 지금 그에게 무죄 판결로 기회가 주어졌다면 그는 어떤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런데 나는 어떤 사람일까? 솔직히 문제아를 외면하는 쪽에 더 가깝지 않은가? 소설을 읽으면서 이런저런 내막을 알았기에 무죄라고 믿지만, 내가 만약 배심원단이었다면? 드미트리 사건을 뉴스로 봤다면? 나는 지금처럼 그의 양심을 믿어줄 수 있을까? 못 믿는다. 도스토옙스키가 말한 촌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다른 사람들은 무죄를 선언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하다보니 제3자로서 누군가에게 이렇게 벌을 내릴 수 있다는 게 참 무서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도파민네이션>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고 내린 결론으로 이 글 끝내려고 한다.  첫째, 필요 이상의 것을 탐하지 말자. 정의껏, 양심껏 해내자. 진정한 자아와 마주할 수 있는 시간과 용기를 가져야겠다. 둘째, 수용과 공감을 낳는 친사회적수치심을 생각하면서 조금더 관대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겠다. 셋째, 미담과 공감에 관한 이야기와 책을 더 많이 보고,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해야겠다. 내 가족과 내 창작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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